이미랑 감독의 영화 ‘딸에 대하여’는 2017년 출간된 김혜진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2023년 스크린에 옮겨져 관객들과 만났습니다. 동성애라는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민감한 주제를 중심에 놓고, 모녀간의 갈등과 화해의 여정을 사실적이고 담담하게 그려내며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미랑 감독은 소설의 묵직한 문제의식을 영화적 언어로 치밀하게 번안해 내며, 원작과는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합니다.
줄거리: 모녀의 갈등과 이별, 그리고 화해의 여정
영화 ‘딸에 대하여’는 50대 학교 급식조리사인 엄마 ‘수진’과 그녀의 딸 ‘윤희’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던 수진은 어느 날, 딸 윤희가 동성인 연인 ‘소라’와 동거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모든 갈등이 시작됩니다. 수진은 처음엔 충격과 분노에 휩싸여 딸을 비난하고 관계를 단절하려고 합니다.
이야기는 수진이 윤희의 집을 무작정 찾아가 소라와 마주치는 장면에서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가족 내에서 벌어진 이 균열은 직장에서 수진이 동료들로부터 받는 미묘한 차별과 편견으로 확장되며, 그녀가 처한 현실의 외로움과 고통을 부각합니다.
갈등의 중심에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딸의 삶을 통제하려는 어머니와 자기 삶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딸의 가치 충돌이 있습니다. 수진은 세상의 시선과 체면을 걱정하지만, 윤희는 자신의 사랑과 정체성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두 사람의 대립은 점차 극한으로 치닫고, 윤희는 결국 어머니와의 관계를 단절한 채 소라와 함께 더 멀리 떠나려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수진은 자신의 가치관을 돌아보고 서서히 내면의 변화를 겪습니다. 동료 조리사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리고 우연히 마주친 소라의 행동을 보며 딸의 선택을 조금씩 이해하게 됩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수진이 윤희를 찾아가 무조건적인 용서를 구하고, 두 사람이 다시 대화를 시작하는 장면입니다.
결말은 명확한 해피엔딩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모녀는 여전히 완전히 화해했다고 보기 어렵지만, 영화는 그들의 "서로를 다시 이해하려는 작은 시작"을 보여주며 여운을 남깁니다. 바로 이 점이 ‘딸에 대하여’가 관객들에게 더 깊은 감동을 주는 이유입니다.
총평: 이미랑 감독의 섬세한 연출과 배우들의 열연
영화 ‘딸에 대하여’는 사회적 논쟁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과장된 감정 폭발이나 선동적 메시지를 피하고 담담하고 세밀한 현실 묘사를 선택했습니다. 이미랑 감독은 원작의 무거움을 유지하면서도 영화적으로는 좀 더 감정선에 집중해 관객들의 몰입을 이끌어냅니다.
특히 주연을 맡은 김진경(수진 역)의 연기는 영화를 지탱하는 기둥입니다. 그녀는 딸을 부정하면서도 내심 죄책감에 시달리는 어머니의 복잡한 심리를 절제된 표정과 행동으로 탁월하게 표현합니다. 관객들은 수진을 비난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그녀의 인간적인 약함에 공감하게 됩니다.
딸 윤희 역을 맡은 하윤경도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가족과 사회의 편견에 맞서는 젊은 여성의 당당함과 내면의 고뇌를 진정성 있게 연기했습니다. 윤희와 소라가 함께 있는 장면에서는 한국 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자연스러운 동성 커플의 일상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영화의 미장센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수진의 직장인 학교 급식실은 회색빛으로, 윤희와 소라가 사는 공간은 따뜻한 원색 계열로 배치해 세대와 가치관의 대비를 시각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음악 역시 절제되어 있으며, 감정선을 부각하되 과잉되지 않습니다.
사회적 파장도 컸습니다. 개봉 당시 일부 보수 단체에서는 상영 반대 운동을 벌였지만, 반대로 많은 관객들은 이 영화를 통해 가족 내 다양성과 포용에 대해 새롭게 성찰하는 계기를 가졌다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영화는 여성영화제, 퀴어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에서 초청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습니다.
평론가들은 ‘딸에 대하여’를 "한국 가족 영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수작"이라 평가했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동성애 영화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가족 구조와 세대 간의 단절 문제를 통찰력 있게 비춘 영화로 자리 잡았습니다.
원작 소설과 비교: 영화만의 색깔은 무엇인가
‘딸에 대하여’는 원작 소설과 큰 줄기는 같지만, 영화만의 차별점을 곳곳에 새겨 넣었습니다. 김혜진 작가의 원작 소설은 철저히 수진의 시점으로만 전개되어, 독자는 오로지 엄마의 내면을 통해 사건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 때문에 원작은 더욱 내면적이고 고독한 독백의 형식을 띱니다.
반면 이미랑 감독은 영화에서는 딸 윤희와 소라의 시점도 병치하여 모녀 양측의 입장을 균형 있게 조명했습니다.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딸의 고통과 당위성에도 공감할 수 있게 만들었고, 작품의 설득력을 높였습니다.
둘째, 원작 소설에서는 딸의 연인인 소라에 대한 묘사가 비교적 제한적입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소라라는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부각해, 그녀가 단순한 갈등의 장치가 아니라 윤희의 삶의 일부이며 동시에 수진과도 미묘한 연결고리를 만들어냅니다. 실제로 영화 후반부 수진과 소라가 우연히 마주치는 장면은 원작에는 없는 영화만의 중요한 장면입니다.
셋째, 결말부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소설은 수진이 변화하려고 결심하는 내면 독백으로 끝나며 다소 열린 결말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모녀가 직접 만나 다시 대화를 시도하는 구체적인 장면으로 클로징 합니다. 이로 인해 영화는 원작보다 감정적으로 더 직접적이며, 관객에게 희망적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합니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사회적 맥락과 시대 배경을 좀 더 적극적으로 드러냅니다. 원작은 가정 내 갈등에 집중한 반면, 영화는 학교 급식실에서 벌어지는 직장 내 차별, 동료 여성 노동자들의 삶, 그리고 세상의 편견을 비추며 이야기를 확장했습니다. 이렇듯 이미랑 감독은 원작의 깊이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영화라는 매체에 맞게 사건의 스펙트럼과 인물의 입체감을 풍성하게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원작을 읽은 이들에게도 영화는 새로운 감동을 선사하며 원작과 영화가 서로 보완 관계에 있음을 보여줍니다.